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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ma 인물탐구

‘주먹 하나로 생계를 이어간 거인’ — 마이티 모, 링 위에서 살아남은 사모아의 망치

by 사모안괴물 2026. 10. 7.

  필자의 블로그 이름이 슈퍼 사모안이고 닉네임 또한 사모안괴물이다. 알 사람들은 다들 알겠지만 마크헌트를 좋아해서 이렇게 한 것인데, 생각해보니 사모안 파이터들이 많은데도 마크헌트 외엔 언급을 안한거 같다. 사실 mma 무대에서는 현재까진 헌트가 제일 유명한건 사실이지만(물론 현 ufc 라이트헤비급 챔피언인 카를로스 울버그도 노력에 따라 역전할 수 있다고 본다.) 다른 사모안 출신의 파이터를 파헤쳐볼까 한다. 누구를 하지 고민하다가 헌트와 동 시대에 뛰었던 또다른 사모안 출신인 마이티모를 해보면 어떨까 싶다.

  마이티모는 올드 팬들이라면 들어봤을 법만 인물이다. 최홍만과의 3차전까지 가는 스토리(1,2차전은 K-1무대였고 3차전은 로드fc 종합격투기 무대였다.) 그리고 수많은 가족을 부양하는 생계형 파이터, 무엇보다 그의 상징인 나가뒈져라 스타일의 물레방아 훅. 기록으로 보면 결코 최강자는 아니고 파이팅 스타일 또한 투박하고 단순한 편이었다. 아무래도 외형때문에 마크헌트와 비교가 많이 되곤 하는데 헌트에 비하면 한 방 펀치력 정도를 제외하곤 헌트가 모든 스탯이 훨씬 좋다. 격투 커리어를 비교해도 헌트가 더 좋고...

  하지만 마이티모 또한 상당한 강자였고 실력있는 파이터들이나 그 물레방아 훅을 피했지 그러지 못한 파이터들은 턱에 꽂히면 그대로 다운되거나 정신이 가출하는 실신을 당하기 일쑤였다. 최홍만의 첫 ko패도 마이티모한테서 당한 것이다. 마이티모의 한때 별명은 '코리안 킬러'였다. 최홍만 뿐만 아니라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유도 은메달리스트였던 김민수,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100kg급 동메달리스트였던 최무배, 대한민국 mma 파이터이자 레슬러씨름선수 출신이던 김경석까지 마이티모의 대포알같은 펀치에 모두 정신을 잃었다. 하지만 마이티모는 웃으며 "코리안이라 그런건 아니다. 그저 내 상대가 누구든 내 주먹은 용서하지 않는다."면서 대수롭지않게 여긴다. 실제로 그는 한국 문화를 좋아하며 요리, 특히 김치까지 직접 담글 줄 아는 친한파 파이터이다. 그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 파고파고에서 샌버나디노까지 — ‘마이티 모’가 만들어진 배경

로드fc 무제한 헤비급 챔피언이던 마이티모. 이 시절도 40대 중반이었는데 국내에선 적수가 없었다.
 
 
 

  마이티 모의 본명은 시알라 모 실리가(Siala-Mou Siliga)다. 1970년 10월 8일 미국령 사모아의 수도 파고파고(Pago Pago)에서 태어났으며, 이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버너디노를 기반으로 활동했다. 185cm 안팎의 키에 120~135kg을 오가는 거대한 체격, 그리고 상대를 한 방에 쓰러뜨릴 수 있는 엄청난 펀치력을 앞세운 그의 모습만 보면 처음부터 격투기를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느껴지지만, 실제 그의 인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미국령 사모아 출신이라는 배경은 마이티 모를 이해하는 데 상당히 중요하다. 사모아계 공동체에서는 가족과 친족의 유대가 매우 강하고, 스포츠 역시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연결되는 중요한 통로였다. 마이티 모 역시 훗날 자신의 가족들을 경기장에 데리고 다녔고, 2007년 K-1 하와이 대회에서는 무려 약 30명의 가족과 친구들이 현장을 찾아 그를 응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그의 여동생 베카 타아풀리는 가족에게 그 경기가 축복과 같은 순간이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의 성장 과정에서 중요한 지역은 캘리포니아의 샌버너디노였다. 마이티 모는 그곳에서 운동을 접했고, 특히 레슬링을 통해 자신의 신체적인 장점을 활용하는 방법을 배웠다. 훗날 그는 MMA를 준비하면서 자신이 대학에서도 레슬링을 했기 때문에 그라운드에 자신이 있다고 직접 이야기했다. 당시 K-1 스타였던 그가 MMA로 영역을 넓힐 수 있었던 데에는 단순히 ‘힘이 세다’는 것 이상의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레슬링과 함께 미식축구 등 여러 스포츠를 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 자료에서는 그를 ‘고교 레슬링에서 상당한 실력을 가진 선수’로 소개되고 그가 훗날 MMA 선수로 활동하면서도 레슬링을 자신의 기반 중 하나로 기억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레슬링은 이후 K-1에서 보여준 묵직한 복싱과 결합하면서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그에게 ‘마이티 모’라는 별명이 붙은 과정도 흥미로운데 2004년 인터뷰에서는 마이티 모 본인이 건설 현장에서 건물이 무너지는 사고를 겪고도 살아 나온 일화를 이야기하며 자신의 힘 때문에 이 별명이 생겼다는 설명을 하기도 했다. 어찌 됐든 ‘마이티 ’라는 이름은 그의 거대한 체격과 괴력, 그리고 사모아 특유의 강인한 이미지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2. ‘오른손 한 방’으로 세계를 뒤흔들다 — K-1의 마이티 모

 
최홍만과의 경기. 이 경기는 2차전인거로 기억하는데 오지마 킥+핵꿀밤으로 최홍만이 이겼다.
 
 

  마이티 모의 이름을 세계 격투기 팬들에게 각인시킨 것은 단연 K-1이었다. 그는 2003년 MMA로 먼저 프로 무대에 등장했지만,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린 곳은 입식격투기의 최고 무대 가운데 하나였던 K-1이었다. 2004년 일본에서 K-1 데뷔전을 치른 그는 당시 정식 격투기 훈련을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히라쿠 호리를 강력한 펀치로 쓰러뜨리며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리고 같은 해 K-1 WGP 2004 in Las Vegas II에서 폭발적인 활약을 펼쳤다. 당시 그는 세르게이 구르, 스콧 라이티, 브레히트 월리스를 차례로 상대했고, 결국 결승까지 승리하면서 토너먼트 정상에 올랐다. 특히 2004년 라스베이거스 대회는 마이티 모라는 이름을 K-1 팬들에게 본격적으로 각인시킨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K-1 공식 데이터베이스에도 그가 2004년 라스베이거스 II 대회 우승자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마이티 모의 진짜 전성기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경기가 바로 최홍만과의 대결이다. 2007년 3월 K-1 요코하마 대회에서 마이티 모는 자신보다 훨씬 크고 긴 리치를 가진 최홍만을 상대했다. 당시 최홍만은 거대한 체격을 활용해 상대를 압박하는 선수였고, 신체조건만 놓고 보면 마이티 모에게 매우 불리한 상대였다. 그런데 마이티 모에게는 체격 차이를 무시할 수 있는 무기가 있었다. 바로 앞서 언급한 오버핸드 라이트와 강력한 물레방아 훅이었다. 그는 거대한 최홍만의 긴 팔 바깥쪽으로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좁혀 펀치를 꽂았고, 결국 최홍만에게 커리어 첫 KO 패배를 안겼다. 이 경기는 지금도 K-1 역사에서 마이티 모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명장면으로 남아 있다.

  그해 4월에는 고향과 가까운 하와이에서 열린 K-1 WGP 2007 in Hawaii에서도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 김경석을 1라운드 KO, 얀 노르키아를 2라운드 KO, 가라테 파이터 출신의 알렉산더 피치쿠노프를 3라운드 TKO로 꺾으며 하루에 세 경기를 모두 승리했다. 특히 피치쿠노프전에서는 펀치 연타로 상대를 무너뜨리며 토너먼트 우승을 차지했다. 경기장에는 약 30명의 가족들이 직접 찾아왔고, 마이티 모에게 이 우승은 단순한 스포츠 타이틀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그의 스타일은 화려한 테크니션과는 거리가 있었다. 대신 짧은 거리에서 엄청난 힘을 실어 날리는 오버핸드 라이트와 훅, 그리고 상대의 공격을 맞으면서도 앞으로 걸어 들어가는 압박이 핵심이었다. 185cm 정도의 헤비급 선수였기 때문에 세미 슐트나 최홍만 같은 초대형 선수들과 비교하면 작았지만, 그 부족한 신체조건을 압도적인 힘과 펀치력으로 상쇄했다. K-1 데이터베이스 기준으로 그는 입식 경기에서 23전 14승을 기록했고, 그중 11승을 KO/TKO로 장식했다.

3. K-1에서 MMA, 그리고 ROAD FC까지 — 왜 그는 그렇게 많이 싸웠나

K-1뿐만 아니라 mma 무대인 벨라토르 토너먼트에도 참가한 마이티 모
 
최홍만과의 3차전. 둘은 9년만에 재대결을 펼쳤으나, 이전과 달리 최홍만은 무기력해진 상태였다.
 
 

  마이티 모의 커리어에서 상당히 독특한 부분은 입식과 MMA를 오가며 엄청나게 많은 경기를 치렀다는 점이다. 그는 MMA 프로 전적 18전 12승 6패를 기록했고, K-1을 비롯한 입식 경기와 복싱, 이후에는 베어너클 복싱까지 경험했다. 한 종목에서 전성기를 보내고 은퇴하는 일반적인 파이터의 경력과는 상당히 달랐다.

  MMA에서는 K-1의 명성을 활용해 일본 무대에 진출했다. K-1 HERO'S에서 김민수를 펀치로 꺾었고, Dynamite!! USA에서는 루벤 비야리얼을 1분 33초 만에 TKO로 쓰러뜨렸다. 특히 이 시기부터 마이티 모는 단순한 ‘입식 파이터’가 아니라 실제로 그라운드에서 싸울 수 있는 선수라는 점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는 조쉬 바넷와 함께 테이크다운과 서브미션 기술을 연습했고, 자신이 대학 레슬링 경험이 있어 그라운드에도 자신이 있다고 설명했다. (조쉬 바넷에 대해선 추후 파헤쳐 볼거다. 그 또한 프라이드 무대에서 맹활약을 했던 파이터이기에)

  이후 DREAM에서는 세미 슐트, 조시 바넷 같은 거물들과 맞붙었다. 특히 조시 바넷에게 패한 경기는 마이티 모의 한계를 보여준 경기이기도 했다. 입식에서는 상대를 한 방에 끝낼 수 있었지만, MMA에서는 펀치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었다. 테이크다운 방어, 체력, 서브미션 대응 등 종합적인 기술이 요구됐다. 그럼에도 마이티 모는 MMA에서 9KO와 3서브미션 승리를 기록하며 단순한 ‘K-1 출신 복서’ 이상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가 한국 팬들에게 더욱 강하게 기억되는 계기는 ROAD FC였다. 2015년부터 ROAD FC에서 활동한 마이티 모는 최무배, 명현만, 최홍만 등 한국 헤비급의 대표적인 선수들과 차례로 맞붙었다. 2016년 ROAD FC 30에서는 명현만을 넥 크랭크로 제압했고, 이후 무제한급 토너먼트에서 최홍만과 다시 만났다. 그리고 2016년 9월 24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ROAD FC 33 결승에서 최홍만에게 다시 한 번 강력한 펀치를 적중시키며 1라운드 4분 6초 KO승을 거뒀다.

  이 승리로 마이티 모는 ROAD FC 초대 무제한급 챔피언이자 2016 무제한급 토너먼트 우승자가 됐다. 이후 카를로스 도요타, 강동국을 차례로 꺾으며 타이틀을 방어했다. 특히 40대 후반에 가까운 나이에도 한국의 젊은 헤비급 선수들을 상대로 계속 경기를 치렀다는 점은 그의 커리어에서 상당히 인상적인 부분이다. ROAD FC 공식 기록에도 그가 2017년 강동국을 상대로 2차 타이틀 방어에 성공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왜 마이티 모는 이렇게 많이 싸웠을까?

여기서 ‘생계형 파이터’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마이티 모 본인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싸운다”고 직접 밝혔다. 그에게는 원래 7명의 자매가 있었다. 그러나 최홍만과의 1차전이었던 2007년 초, 그에게는 4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었는데 남동생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사실 사고 자체는 크진 않았고 남동생 또한 그냥 흉부에 살짝 통증이 있어 입원한 수준이었는데 치료 과정에서 의료사고가 발생하여 갑자기 사망하였다고 한다. 정확한 사인은 불분명하나 호스가 폐를 뚫으면서 발생한 쇼크사라는 얘기가 많다. 이 사고로 마이티 모는 슬픔에 빠지고 남동생의 4명의 자녀들까지 생계를 책임지게 되면서 도합 11명의 아이를 먹여 살리는 가장의 무거운 어깨를 가지게 된 것이다.

  마이티 모는 UFC의 장기 계약을 통해 안정적인 고액 수입을 얻은 스타가 아니었다. K-1, HERO'S, DREAM, Bellator, ROAD FC 등 여러 단체를 이동했고, 40대 이후에도 계속 새로운 경기를 받아들였다. 실제 2007년 Dynamite!! USA 당시 공개된 파이트머니 자료를 보면 마이티 모의 대전료는 3만 달러였다. 물론 당시 기준으로 적지 않은 돈이지만, 글로벌 슈퍼스타급 파이터들과 비교하면 엄청난 금액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가족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2007년 K-1 하와이 대회에 수십 명의 가족이 함께 응원하러 왔다는 기록, 그리고 당시 인터뷰에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동시에 MMA 훈련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한 점 등을 보면 가족은 그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었고 삶의 원동력인 셈이다. 그래서 마이티 모의 ‘생계형 파이터’라는 이미지는 가난했다는 단순한 의미라기보다, 한 번의 대박 계약으로 모든 것을 해결한 슈퍼스타가 아니라 경기 자체를 계속 만들어 수입을 확보해야 했던 헤비급 베테랑의 삶에 더 가깝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는 2000년대부터 2010년대 후반까지 무대를 가리지 않고 싸웠고, 심지어 MMA·킥복싱·복싱·베어너클까지 넘나들었다. 말 그대로 싸울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링과 케이지를 찾아갔던 선수였다.

4. 마지막까지 링을 떠나지 않은 남자 — 은퇴와 현재의 마이티 모

상대였던 소쿠주 또한 일본 무대에서도 많이 뛴 베테랑이지만 마이티 모에 비하면 그저 젊은이에 불과하다(...)
 
 
 

  마이티 모의 선수 생활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한 번에 ‘끝’난 것이 아니다. ROAD FC에서 2016년 무제한급 토너먼트를 우승하고 2017년까지 챔피언으로 활동한 뒤에도 그는 계속 싸웠다. 2018년 5월 ROAD FC 47에서는 길버트 이벨과 맞붙었다. 이 경기에서 마이티 모는 2라운드 3분 43초 암바에 걸려 패했고, 이것이 그의 ROAD FC 및 사실상 마지막 정규 MMA 커리어를 마무리하는 중요한 경기로 남았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 끝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이티 모는 2019년 Valor Bare Knuckle 대회에 참가했다. 맨주먹에 가까운 형태의 베어너클 복싱 토너먼트에서 라모 티에리 소쿠주를 3라운드 TKO로 꺾고 결승에 올라갔지만, 마크 고드비어에게 TKO 패배를 당했다. 이미 50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다시 새로운 격투 종목에 도전한 것이다.

  이 부분은 마이티 모라는 선수를 이해하는 데 굉장히 중요하다. 많은 선수들은 전성기가 지나면 체육관을 운영하거나 코치로 전향하고, 공식 경기에서는 물러난다. 하지만 마이티 모는 달랐다. K-1에서 성공한 뒤 MMA를 했고, MMA 이후에는 ROAD FC에서 다시 전성기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줬으며, 이후에는 베어너클까지 경험했다. 자신의 몸이 허락하는 한 계속 싸우는 것이 그의 선수 인생에서 하나의 방식처럼 보였다. 또한 경기가 없을 땐 건물 경비원도 하는 등 여전히 투잡을 뛰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2026년 현재 55세가 된 마이티 모는 공식적인 정규 MMA 선수 생활을 사실상 마무리한 격투기 베테랑이자 레전드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ROAD FC 역시 그의 공식 프로 MMA 기록을 12승 6패로 정리하고 있으며, 그의 대표적인 경력으로 최홍만 KO, 무제한급 토너먼트 우승, 챔피언 등극 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커리어를 되돌아보면 상당히 묘한 선수였다는 생각이 든다. K-1에서는 두 차례 월드 그랑프리 토너먼트 우승을 차지했고, 최홍만을 KO시키며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 그러나 세미 슐트, 조시 바넷 같은 선수들에게 패하면서 한계도 경험했다. 이후 한국으로 건너와 ROAD FC 무제한급 토너먼트를 우승했고, 40대 중후반의 나이에 다시 최홍만을 KO시키며 자신의 이름을 격투기 역사에 새겼다.

  무엇보다 마이티 모의 인생에서 인상적인 것은 ‘완벽한 챔피언’이 아니라 ‘끝까지 살아남은 파이터’였다는 점이다. 그의 전적에는 패배도 많다. 입식에서는 20승 22패로 패배가 승리보다 많고, MMA에서도 12승 6패를 기록했다. 하지만 그가 상대했던 선수들의 이름을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최홍만, 레미 본야스키, 게리 굿리지, 세미 슐트, 조시 바넷 등 한 시대를 대표했던 거물들과 맞붙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오버핸드 라이트 한 방으로 수많은 상대를 쓰러뜨렸다.

  결국 마이티 모는 ‘무적의 파이터’가 아니었다. 대신 돈이 필요하면 싸웠고, 새로운 무대가 생기면 도전했고, 나이가 들어도 다시 링에 올랐던 선수였다. 그래서 그의 별명 '마이티 모'는 단순히 힘이 세다는 뜻을 넘어선다. 파고파고에서 시작해 샌버너디노를 거쳐 K-1의 세계무대와 일본 MMA, 그리고 한국 ROAD FC까지 누빈 그의 인생 자체가 거대한 항해에 가까웠다.

 

마이티 모.
챔피언이었고, 도전자였고, 때로는 생계를 위해 싸워야 했던 가장 현실적인 헤비급 파이터이자 이 시대의 아버지를 대표하는 파이터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의 인생을 움직인 것은 결국 하나였다.
“다시 싸울 수 있다면, 나는 링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