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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ma 인물탐구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사나이” — 마크헌트, 지옥 같은 어린 시절에서 K-1의 왕과 UFC의 전설이 되기까지

by 사모안괴물 2026. 10. 2.

  이번엔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파이터인 마크헌트에 대해서 간단히 작성해 보고자 한다. 그동안 여러 번 언급했고, 블로그 제목과 닉네임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전,현직 파이터가 마크헌트이다. 아마 2000년대부터 격투기를 보고 팬심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이 양반을 안좋아할 사람이 있을까 싶다...하지만 그의 격투스타일만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거칠고 굴곡있는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 마크헌트이다. 2010년대 말에 마크헌트의 자서전인 'Born to Fight"라는 책을 구매해서 번역기 돌려가면서 읽은 적이 있는데 나름 마크헌트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생각외로 몰랐던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한글 번역판은 없지만 필자처럼 마크헌트라는 파이터의 팬이라면 한번 쯤은 볼 만하다.(단, 이 양반 인터뷰할때도 그러고 말투에 은근히 이해못할 비유?가 있어서 번역이 순탄하진 않을 수 있다ㅠㅠ)

  그래서 단순히 이 블로그도 mma나 ufc 자체에 관련된게 아닌 전,현직 파이터들의 삶과 인생스토리에 대해서도 언급해보고자 한다. 물론 필자 최애 파이터이니 당연히 1순위로 한 것이고.

  마크헌트의 인생은 평범한 격투기 선수의 성공담과는 상당히 다르다. 뉴질랜드 사우스 오클랜드의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성장했고, 젊은 시절에는 교도소를 오가기도 했다. 그러다 우연한 거리 싸움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 뒤 격투기 선수의 길에 들어섰고, 불과 몇 년 만에 세계 최고의 입식격투 무대였던 K-1의 정상에 올랐다. 이후 MMA로 전향해 PRIDE와 UFC를 거치면서 수많은 패배와 몰락을 경험했지만, 다시 UFC 헤비급 상위권까지 올라가며 자신의 이름을 세계에 각인시켰다.

마크헌트가 집필한 자서전 'Born to Fight'

 

1. “싸움밖에 몰랐던 소년” — 사우스 오클랜드의 거친 성장기와 격투기 입문

마크헌트의 가족. 가운데에 어머니한테 안겨있는게 마크헌트이다.
 
 
 

  마크헌트는 1974년 3월 23일 뉴질랜드 사우스 오클랜드에서 태어났다. 사모아계 대가족에서 성장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상당히 힘든 환경을 경험했다. 헌트는 훗날 자신의 자서전 《Born to Fight》를 통해 아버지에게 반복적인 폭력을 당했고, 가족 내부의 학대와 가난 속에서 성장했다고 직접 이야기했는데, 실제로 헌트는 원래 중학교까지 럭비를 했다가 가정형편 때문에 그만 뒀다고 한다. 헌트 뿐만 아니라 그의 형제들 역시 가정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특히 큰 누나는 10여 년 동안 친부에게서 성폭행을 당했을 정도로 끔찍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 와중에 헌트를 지켜준건 지금의 큰 누나와 쌍둥이 형들이었는데, 쌍둥이 형 중 한 명은 어릴 적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2014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헌트 스스로도 어릴 적을 회고하며 "차라리 집보단 길거리가 안전하다"고 했을 정도였고 자서전에 2005년 아버지가 췌장암으로 사망할 때를 기억하면서,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그냥 늙고 초라한 초록 괴물같았다."고 할 정도였다. UFC 역시 그의 인터뷰와 자서전을 바탕으로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충분한 보호와 지지를 받지 못했고, 이러한 환경이 훗날 그의 강한 정신력과 생존 본능에 영향을 줬다고 소개한 바 있다. 하지만 몇 년 전 까지도 어릴 적 당한 학대가 꿈에서도 나와 그를 괴롭혔고, 정신과에서 약을 처방받을 때가 있다고 한다.

  어린 헌트에게 세상은 결코 평온한 곳이 아니었다. 가난한 환경과 가정 내 폭력은 그를 일찍부터 거칠게 만들었고, 청소년기에는 폭력적인 문제에 휘말리기도 했다. 결국 그는 두 차례 교도소 생활까지 경험했다. 당시의 헌트에게 프로 격투기 선수라는 직업은 전혀 인생의 목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그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사람에 가까웠다.

  그런 헌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은 사건이 있었다. 두 번째 교도소 생활을 마친 뒤 오클랜드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친구를 도와 싸움에 뛰어들었는데, 이 과정에서 헌트의 엄청난 펀치력을 목격한 클럽의 경비원이 그에게 무에타이 훈련을 권했다. 헌트가 직접 회고한 내용에 따르면, 그 경비원은 그의 싸움 실력을 보고 체육관에서 제대로 훈련해보라고 제안했고, 놀랍게도 헌트는 그 직후 링에 올라가 경기를 치렀다. (참고로, 헌트의 첫번째 시합 대전료는 돈이 아닌, 맥주 6병이었다고 한다...) 

  처음부터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던 선수는 아니었고 그렇다고 신장이 커서 리치의 이점을 살리기에 좋은 선수도 아니었다. 헌트에게 가장 먼저 주목받은 것은 기술적인 완성도보다 엄청난 힘과 펀치력, 그리고 맞아도 쉽게 쓰러지지 않는 신체적인 내구력이었다.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무에타이와 킥복싱을 익히기 시작했고 호주로 이동해 훈련을 이어갔다. 사우스 오클랜드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용했던 싸움의 본능이 체계적인 격투기 훈련을 만나면서 점차 ‘선수의 능력’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헌트에게 격투기는 단순히 돈을 버는 직업이 아니었다. 그는 훗날 “격투기가 자신을 구했고 그게 아니었으면 평생 감옥에 있었을 것이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여러 차례 했다. 가난과 분노 속에서 살던 자신에게 훈련은 규율과 목표를 제공했고, 결국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격투기 인생은 불과 몇 년 뒤 세계 최고의 무대 가운데 하나인 일본 K-1의 정상으로 이어진다. 놀라운 것은 헌트가 처음부터 엘리트 선수로 성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식 격투기 수련을 상당히 늦은 나이에 시작한 선수가 세계적인 챔피언이 된 것이다.

  그리고 2001년 12월 8일, 마크 헌트의 인생에서 가장 상징적인 밤이 찾아온다.

2. “슈퍼 사모안의 탄생” — K-1 정상에서 MMA의 깊은 수렁까지

K-1시절 헌트의 라이벌로 꼽히는 '무관의 제왕' 제롬 르 밴너. 둘 다 전진만 하는 화끈한 스타일이라 둘 경기는 명승부가 많았다.
 
2001년 K-1 WGP 우승한 헌트. 이 때 우승으로 최초이나 유일하게 K-1 WGP 비유럽권 우승자이다.
 
헌트 프라이드에서의 마지막 경기였던 2006년 프라이드 남제에서 효도르와의 대결
 
 

  마크 헌트가 세계적인 스타로 이름을 알린 곳은 UFC가 아니라 일본의 K-1이었다. 당시 K-1은 세계 정상급 킥복서들이 모이는 최고의 입식격투 무대였으며, 헌트는 자신의 엄청난 펀치력과 맷집을 앞세워 빠르게 정상급 선수로 성장했다. 그리고 2001년 K-1 월드 그랑프리에서 그의 인생을 바꾼 일이 일어났다.

  헌트는 8강에서 제롬 르 밴너를 KO로 꺾었는데, 당시 밴너는 강력한 우승 후보였고, 모두들 그를 피했지만 상남자 헌트는 전년도에 본인에게 패배를 안긴 밴너를 선택함으로써 두 선수 간 리매치가 잡힌거였다. 이 경기는 헌트의 K-1 경력에서 가장 재밌으면서도 멋진 경기이므로 마크헌트vs레이세포 노가드 매치와 더불어 꼭 볼만한 경기이다.

  이어서 준결승에서는 스테판 레코를 판정으로 제압했다. 결승에서는 프란시스코 필리오를 연장 판정으로 꺾으면서 그랑프리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헌트는 대회 전부터 최상위 우승 후보로 평가받던 선수가 아니었지만, 하루에 세 명의 정상급 선수를 연달아 상대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K-1의 공식 역사에서도 2001년 헌트의 우승을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때부터 헌트의 이름은 일본 격투기 팬들에게 강하게 각인됐다. 특히 그의 스타일은 당시에도 매우 독특했다. 헌트는 상대의 공격을 정교하게 피하면서 완벽한 기술로 싸우는 유형이 아니었다. 오히려 상대의 공격을 버티고 한 방의 강력한 펀치로 흐름을 뒤집는 스타일이었다. 이는 헌트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무쇠턱 금강불괴 맷집이었기에 가능한 스타일이다. 

  사실 헌트가 이 해에 우승한 데에는 상당한 운도 따랐다. K-1 WGP는 각 지역별 GP우승자 및 전 대회 우승자, 그간의 기록으로 추천을 받은 선수 등이 모여서 예선전을 치르고, 연말에 토너먼트 식으로 8강부터 결승까지 치르는 방식이었는데 이 오세아니아 지역GP에서 헌트는 K-1 역사의 산증인 그 자체인 어네스트 후스트에게 판정패를 당했다. 그러다가 패배자 간의 리저브 매치를 가질 기회를 가졌는데 여기서 마크헌트vs레이세포의 노가드 매치가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 경기의 승자였던 레이세포가 안와골절로 부상당하자 WGP에 참가할 행운이 헌트에게 주어진 것이고 이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

마크헌트vs레이세포 전설의 노가드 경기. 세포는 살짝 가드를 올리지만 헌트는 그런거 없이 그냥 얼굴로 주먹을 다 받았다.

 

  2002년에도 K-1 월드 그랑프리 3위에 오르는 등 정상급 활약을 이어갔다. 하지만 비교적 빠른 시간에 성공의 맛을 본 헌트는 꾸준하게 훈련하는 착실한 스타일은 결코 아니었다. 맨날 놀러 다니고 술 마시고 도박하는 등, 2001년 당시 WGP 우승상금이 4천만 엔이었는데 이를 머지않아 다 탕진한 것이고 자연스럽게 그의 입식격투 커리어는 내리막길을 타고 있었다.그리고 2003년 그는 게리굿리지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K-1 무대를 떠나고 새로운 도전을 선택한다. 바로 종합격투기, MMA였다.

  2004년 헌트는 K-1에서 MMA로 전향해 일본 PRIDE 무대에 등장했다. 당시 MMA에는 레슬링, 유도, 주짓수, 킥복싱 등 서로 다른 무술을 종합적으로 사용하는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순수 입식격투기 선수였던 헌트에게는 엄청난 도전이었다. 실제로 그의 초기 MMA 커리어는 순탄하지 않았으며 데뷔전에서 일본의 유도 영웅인 요시다 히데히코를 만나 선전했으나, 그라운드 스킬의 부재로 인해 암바 패배를 당하였다.

  이후, 5연승을 달렸는데 당시 상대 중에 미르코 크로캅, 반더레이 실바도 있었다. 그러나 2006년 들어서면서 조쉬바넷, 에밀리아넨코 효도르를 만나 또다시 그래플링에서 밀려 2연패를 당하였고 머지않아 프라이드는 UFC에 합병되었다. 모두들 UFC로 옮기거나 다른 단체를 알아보는 도중 헌트는 감량하기 싫다는 이유로 1년 넘게 말그대로 편하게 놀고 먹기만 했다...(이 때가 2007년인데, 헌트 나이 33세로 한창 경기를 뛰어야 할 시기에 백수가 된 것이다.) 이후 K-1에서 세미슐트의 노잼 독주 시기가 길어지자, 주최 측에서 헌트에게 슐트를 상대해 달라고 해서 경기를 뛰었으나, 입식 경기를 5년만에 한 데다가 직전까지 훈련 안하고 놀고 먹던 헌트가 격투로봇 세미슐트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결국 허무하게 1R KO패가 되었는데, 이는 헌트의 입식 커리어에서 제대로 된 첫 KO였다. 이후 MMA무대로 돌아왔으나 알리스타 오브레임, 멜빈 마누프, 게가드 무사시에게 허무하게 지면서 헌트의 격투 커리어는 사실상 끝났다는 평가가 대다수였다. 특히 멜빈 마누프는 헌트보다 40킬로가 가벼운 데다가 바다하리의 세컨으로 참석하는 도중에 헌트를 상대하게 된 건데, 헌트가 방심하고 들어갔다가 18초 만에 KO패가 되었고 이는 헌트 격투 커리어에서 최고로 굴욕적인 순간이었다.

  MMA에서의 헌트는 약점이 너무 분명했다는 것이었다. 타격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이었지만, 상대가 그를 그라운드로 끌고 가면 고전했다. 특히 서브미션 방어가 약했던 초창기에는 주짓수와 그래플링을 앞세운 선수들에게 연이어 패했다. UFC가 PRIDE를 인수하면서 헌트의 계약 역시 UFC로 넘어가게 됐는데, 당시 헌트는 연패 중이었고 UFC는 그에게 계약을 정리하는 대가로 돈을 지급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특히 헌트는 당시에 체육관도 별도로 나가지 않고 격투 의류 브랜드 사업을 했다가 대차게 말아먹으면서 빚이 굉장히 불어난 상태였기에, 당시 UFC에서는 헌트에게 지급하려던 금액(약 4~5억으로 추정)을 주고 계약을 안하려 했지만 헌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싸우는 길을 선택했는데 UFC 최초로 받던 파이트머니가 한화로 1,000만원도 채 안됐다고 한다. 한 마디로, 본인의 절실함을 가지고 다시 정신차리겠다는 의지였으며 이 결정은 훗날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게 된다. 헌트는 큰 마음먹고 2010년 만36세라는 늦은 나이에 UFC 데뷔전을 치렀지만, 상대였던 션 맥코클에게 또 기무라로 패배하면서 6연패의 늪에 빠지게 됐다. 2006년부터 2011년 초까지 약 4년 반 동안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하는 긴 침체기를 겪었는데 UFC가 훗날 그의 커리어를 소개하면서도 이 시기를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추락 중 하나로 언급할 정도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헌트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3. “끝난 줄 알았던 남자의 부활” — UFC 입성, 전성기, 그러나 안 좋은 마무리

 
 
 
 

  UFC에서 마크 헌트의 이야기는 흔히 ‘불가능한 부활’로 표현된다. 2010년 UFC 데뷔전에서 션 맥코클에게 1라운드 서브미션으로 패했을 때만 해도 그의 커리어가 사실상 끝났다고 보는 시선이 많았다. 그리고 2011년 2월 헌트는 그다음 경기에서 크리스 턱셔러를 상대하게 됐는데 당시 턱셔러는 헤비급 챔피언이었던 브록레스너의 오랜 친구이자 스파링 파트너였는데, 그의 스타일 또한 레스너와 같이 강력한 레슬링과 파운딩이 주무기였기 때문에 헌트에게는 상성이 좋지 않았고 이 경기에서 패배하면 헌트는 방출될 가능성이 아주 컸다. 경기 양상도 보면 테이크다운을 당해서 역시나 싶었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서브미션도 방어하면서 역전 KO승을 만들고 이 대회 보너스도 받음으로써 마크헌트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후 헌트는 칙콩고, 스테판 스트루브를 KO시키고, 주니어 도스 산토스와 치열한 경기를 펼쳤으며, 안토니오 ‘빅풋’ 실바와는 UFC 역사에 남을 명승부를 만들었다. 특히 2014년 일본에서 열린 로이 넬슨전에서는 강력한 어퍼컷으로 넬슨을 KO시키며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워크오프 KO’를 보여줬다. 2014년에는 결국 UFC 헤비급 잠정 타이틀전까지 올라갔다. 상대는 파브리시우 베우둠이었다. 비록 베우둠에게 패하면서 UFC 챔피언 벨트를 차지는 못했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 4년 넘게 승리가 없었던 선수가 세계 최고의 MMA 단체에서 타이틀 도전자까지 올라왔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반전이었다. UFC 역시 헌트의 이 시기를 ‘놀라운 커리어 부활’로 소개했다.

  그러나 헌트의 커리어 후반부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있다. 바로 UFC 200 브록 레스너전과 이후의 소송이다. 2016년 7월 9일 UFC 200에서 헌트는 WWE 스타 브록 레스너와 맞붙었다. 헌트는 당시 이미 UFC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온 베테랑이었고, 레스너는 WWE 활동을 병행하면서 UFC로 일회성 복귀전을 치르는 상황이었다. 경기에서는 레스너가 레슬링과 그라운드 컨트롤을 앞세워 헌트를 판정으로 꺾었다. 

  그런데 경기 후 엄청난 문제가 발생했다. 레스너의 경기 전 약물검사에서 금지된 경기력 향상 약물(PED) 관련 양성 반응이 나왔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후 레스너에 대한 징계가 내려졌고, 경기 결과 역시 노 콘테스트(No Contest)로 변경됐다.

헌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UFC와 데이나 화이트, 브록 레스너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헌트 측의 핵심 주장은 UFC가 약물 사용과 관련한 규정을 공정하게 적용하지 않았고, 약물 사용이 의심되거나 적발된 선수와 자신을 경기시키면서 자신에게 신체적·경제적 피해를 입혔다는 것이었다. 소송에는 사기, 배터리, 민사상 공모 등의 주장이 포함됐다.

  소송은 상당히 복잡하게 진행됐다. 2019년 네바다 연방법원은 대부분의 청구를 기각했고, 이후 항소심에서 일부 청구가 다시 살아나면서 헌트가 증거를 확보할 기회를 얻었다. 2021년 제9순회항소법원은 헌트의 사기·배터리 및 관련 공모 청구 일부에 대해 하급심의 초기 판단을 뒤집고 추가 절차를 허용했다. 즉, 당시에는 소송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 2023년 네바다 연방법원은 다시 UFC·데이나 화이트·레스너 측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헌트가 자신의 주장을 재판으로 가져가기 위해 필요한 손해에 대한 증거를 충분히 제시하지 못했다고 판단하면서 피고 측의 약식판결 신청을 받아들였다.

  헌트는 다시 항소했다. 그리고 2025년 4월 22일 제9순회항소법원은 하급심 판단을 유지했다. 항소법원은 헌트가 주장한 사기와 배터리 등의 청구에서 중요한 요소인 손해를 입증할 충분한 증거를 기록상 제시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이후 헌트가 미국 연방대법원에 상고를 신청했지만, 2025년 12월 8일 연방대법원은 상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로써 이 소송의 주요 법적 절차는 사실상 종결됐다.

  사실 헌트는 그동안 격투 커리어에서 상당히 많은 약물러와 붙었었다. 아마 그와 붙었던 상대 대부분이 약물 검출 경력이 있는 선수들이었는데, 헌트는 100% 약물로부터 자유롭다고 할진 모르겠으나 최소한 공식적으로 양성 반응이 나온 적 없고 본인이 만약 약물 이력이 있으면 사비를 쓰면서까지 UFC와 소송을 벌였을까? 필자가 헌트를 좋아하는 것도 경기스타일이 화끈한 것도 있지만 인간 마크헌트도 정말 상남자스럽고 불의를 보면 못참는 행동이 멋있고 나였어도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서 응원하게 된다.

  아무튼 2018년이 되면서 헌트도 40대 중반이 되면서 파이터로서 전성기를 훌쩍 지난 나이가 되고 결국엔 3연패를 당하고 UFC와의 계약까지 종료되면서 미련없이 종합격투기 무대를 떠나게 된다. 

4. “마지막 워크오프” — UFC를 떠난 뒤의 삶과 은퇴, 그리고 현재

 
 
 

  마크 헌트의 UFC 마지막 경기는 2018년 12월 저스틴 윌리스전이었다. 헌트는 이 경기에서 판정패했고, UFC에서는 이후 더 이상 경기를 치르지 않았다.UFC 공식 기록은 MMA 전적을 13승 14패 1무로 기록하고 있고 다른 파이터들에 비하면 눈에 띄는 기록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격투 철학과 직진밖에 모르는 성향은 팬들의 향수와 함성을 이끌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었다.

  헌트는 곧바로 격투기를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었다. 2020년에는 전 럭비 선수 폴 갈렌과 복싱 경기를 치렀고, 6라운드 판정패를 기록했다. 이후 2022년에는 또 다른 전 럭비 스타인 소니 빌 윌리엄스와 복싱 경기를 치렀다. 이 경기에서 헌트는 4라운드에 윌리엄스를 두 차례 다운시키며 TKO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경기 직후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 격투기 경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장면은 상당히 상징적이었다. 한때 K-1 링에서 세계 정상에 올랐고, PRIDE와 UFC에서 세계 최고의 헤비급 파이터들과 싸웠던 헌트가 자신의 커리어 마지막 경기에서도 강력한 오른손으로 상대를 쓰러뜨린 것이다. 헌트 특유의 ‘맞으면서 버티고 결국 한 방으로 끝내는’ 스타일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2022년 은퇴 이후 헌트는 더 이상 파이터로 활동하지 않고 있다. 그는 2022년 당시 “30년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31년 동안 싸웠다”는 취지로 이야기하며 오랜 격투기 인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다만 헌트의 은퇴 후 삶은 완전히 조용하지만은 않았다. 앞서 언급한 대로 UFC와의 법적 분쟁은 2025년 연방대법원의 상고 기각까지 이어졌다. 헌트가 UFC를 상대로 제기했던 소송은 최종적으로 법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소송비용 문제까지 남았다.

  그리고 2026년 현재 헌트의 근황을 이야기할 때는 한 가지 최근 사건을 별도로 언급할 필요가 있다. 2026년 4월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에서 헌트가 가정폭력 관련 사건으로 신체적 위해를 가할 의도로 스토킹 또는 협박했다는 혐의로 체포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헌트는 보석으로 석방됐으며, 당시 보도 기준으로 관련 보호명령 절차도 진행됐다. 헌트 측은 신체적 폭력이 없었다고 주장했고, 일부 혐의 내용에 대해서는 변호인 측에서 이의를 제기했다. 따라서 이는 유죄 판결이 확정된 사건이 아니라 당시 제기된 형사 혐의와 법적 절차로 구분해서 봐야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에도 헌트가 UFC와 관련된 새로운 법적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했다는 것이다. 2026년 4월 보도에 따르면 헌트는 과거 UFC 소송과 별개의 새로운 법적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는 과거 소송이 2025년 연방대법원 상고 기각으로 마무리된 것과는 별개의 움직임이다.

 

  마크 헌트의 인생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끝났다고 생각되는 순간마다 다시 일어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것은 단순히 승리만 반복한 성공담은 아니다. 어린 시절의 가정폭력과 가난, 교도소 생활, K-1 정상 등극, MMA 전향, 연패, UFC에서의 부활, 잠정 타이틀전, 브록 레스너전과 법적 분쟁, 그리고 결국 은퇴까지 이어지는 굴곡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가 K-1에서 우승했을 때도, MMA 무대에서 4년 넘게 승리하지 못했을 때도, 로이 넬슨을 한 방에 쓰러뜨렸을 때도, 브록 레스너전 이후 UFC와 법정에서 싸웠을 때도 헌트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크 헌트라는 이름은 단순히 ‘펀치가 강한 헤비급 파이터’라는 의미를 넘어선다. 어찌 보면 그는 펀치보다 더 강력한 정신력과 멘탈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이용해 '마크헌트' 라는 이름을 세계에 알린 것이다. 그는 세계 정상에 오른 챔피언이면서 동시에 수많은 패배를 경험한 선수였고, UFC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했음에도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인물이었다. 그리고 2022년 마지막 링을 떠나면서 그의 긴 격투기 인생은 마침내 막을 내렸다.

 

K-1의 왕이었던 남자, UFC에서 다시 살아난 남자, 그리고 마지막까지 자신의 방식으로 싸웠던 남자. 이것이 ‘슈퍼 사모안’ 마크 헌트의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