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프라이드FC에서의 최강자가 에밀리아넨코 효도르였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최고의 인기스타는 누구였냐고 물어보면 많은 팬들은 크로캅을 골랐을 것이다. K-1과 프라이드를 모두 시청했던 격투기 팬이라면 마크헌트와 더불어 크로캅 또한 낭만과 감성 파이터를 꼽을때 뺄 수 없는 파이터이기 때문이다. 크로캅이 인기가 많았던 것은, 그의 시그니처라고 불리는 '왼발 하이킥'뿐만이 아니다. 그가 살아온 인생 또한 마크헌트 못지않고 고난과 역경이 가득 찼지만 그럴 때마다 더 강해져서 돌아오고 포기하지 않는 근성과 정신력으로 링과 옥타곤에서 감동을 선사하던 사나이였기 때문이다. 입식격투기와 종합격투기 무대에서 맹활약을 했던 이 크로아티아 파이터에 대해서 파헤쳐 보자.
1. 전쟁이 만든 소년 — 가난한 집 차고에서 시작된 ‘크로캅’의 탄생



미르코 필리포비치, 우리가 흔히 ‘크로캅(Cro Cop)’이라고 부르는 사나이의 인생은 평범한 격투기 선수의 성공담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는 유고슬라비아 해체와 전쟁의 혼란 속에서 성장했고, 가난과 가족의 상실을 경험했으며, 한때 경찰 특수부대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K-1과 PRIDE, UFC, RIZIN, Bellator라는 세계적인 무대를 모두 경험한 헤비급 격투기 역사의 산증인이 됐다.
크로캅은 1974년 9월 10일 크로아티아 동부의 빈코브치에서 태어났다. 당시 이 지역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 속해 있었다. 그의 가정은 부유한 집안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버지 자르코는 철도 관련 회사에서 전기기사로 일했고, 미르코에게는 누나가 있었다. 어린 시절의 크로캅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아버지가 만들어준 허름한 훈련 환경이다. 아버지는 미르코가 운동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차고에 샌드백을 만들어줬고, 집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해 운동기구를 마련해줬다. 훗날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헤비급 파이터 중 한 명이 된 사람의 출발점이 고급 체육관이 아니라 집 차고였던 것이다.
어린 크로캅은 운동 자체를 좋아했다. 육상에서 단거리 종목을 했고, 태권도와 가라테 등을 접하면서 발차기 능력을 발전시켰다. 특히 장클로드 반담이 출연한 영화 《블러드 스포츠》 같은 작품은 어린 소년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단순히 영화를 보고 격투기를 좋아하게 된 것만으로 크로캅의 인생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앞서 언급한 대로 그가 성장한 시대 자체가 평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되면서 크로아티아 독립전쟁이 벌어졌다. 크로캅의 고향 주변 역시 전쟁의 영향을 받았고, 그는 어린 나이에 전쟁이라는 현실을 경험했다. 전쟁으로 인해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했던 시기도 있었고, 안전을 위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생활하기도 했다. 훗날 크로캅이 보여준 극도의 규율과 냉정함에는 이런 성장 배경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단순히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불안정한 현실 속에서 자신을 지켜내야 했던 사람이었다. 더욱 가슴 아픈 사건은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크로캅이 19세였던 1994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가 인생에서 가장 존경했던 사람이 바로 아버지였기 때문에 이 사건은 커다란 상실이었다. 당시 집안의 경제적 상황도 좋지 않았다. 이후 그는 생계를 위해 여러 일을 해야 했고, 훗날 자신의 격투기 경력이 단순히 ‘명예와 돈을 위한 꿈’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UFC와의 인터뷰에서 크로캅은 1995년 자그레브로 올라갈 당시 주머니에 돈이 거의 없었고, 스포츠가 자신과 가족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그 과정에서 크로캅은 크로아티아군에 들어갔고, 이후 크로아티아 경찰 특수부대와 연결되는 경력을 쌓게 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군인으로서의 삶보다 격투기 선수로서의 가능성이 더 컸다. 군 내부에서도 그의 운동 능력을 눈여겨본 사람들이 있었고, 그는 지휘관에게 훈련에 집중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이것이 훗날 ‘Cro Cop’이라는 별명이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실제 경력에서 비롯된 이유다. ‘Croatian Cop’, 즉 크로아티아 경찰 출신 파이터.
결국 전쟁과 가난, 가족의 죽음, 군과 경찰 경험은 크로캅이라는 인물을 만들어낸 배경이 됐다. 그리고 그 모든 경험을 압축한 듯한 그의 격투 스타일은 훗날 링 위에서 나타난다. 감정적으로 날뛰기보다 침착하게 상대를 바라보고, 필요할 때 단 한 번의 발차기로 경기를 끝내는 스타일이었다. 어린 시절 차고에서 혼자 샌드백을 두드리던 소년은 그렇게 세계 무대로 향하기 시작했다.
2. K-1의 괴물에서 프라이드의 사신으로 — “왼발은 무덤”이라는 전설



크로캅의 본격적인 격투기 경력은 1990년대 중반 K-1에서 시작됐다. 1996년 K-1에 등장한 그는 당시부터 뛰어난 신체 능력과 강력한 킥으로 주목받았다. 특히 왼발 하이킥은 그의 상징이었다. 상대의 가드를 뚫고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왼발은 빠르고 정확했으며, 단순히 힘만 센 것이 아니라 태권도와 가라테에서 비롯된 유연한 궤적을 갖고 있었다. 한 마디로 알고도 못 막는 기술이었다.
1996년 K-1 데뷔전에서 제롬 르 밴너를 판정으로 꺾었지만, 결승에서는 당시 최정상급 파이터였던 어네스트 후스트에게 패했다. 그러나 이것은 실패라기보다 세계 정상으로 가는 첫 번째 시험에 가까웠다. 크로캅은 이후 K-1에서 꾸준히 성장했고, 1999년 K-1 월드 그랑프리 준우승이라는 성과를 거뒀다. 당시 그는 무사시와 샘 그레코를 연이어 꺾고 결승에 올라갔지만 후스트에게 패했다. 2000년에도 K-1 월드 그랑프리 결승에 진출했으나 다시 후스트에게 막혔다. K-1에서만큼은 어네스트 후스트란 그에게 넘지 못한 벽이었다.
그럼에도 크로캅의 이름은 점점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K-1에는 이미 피터 아츠, 어네스트 후스트, 앤디 훅, 마이크 베르나르도 등 전설적인 킥복서들이 존재했지만 크로캅은 그들과 다른 스타일을 보여줬다. 그는 불필요하게 난타전을 벌이기보다 거리를 잡고 상대를 분석한 뒤 왼발을 꽂았다. 팬들 사이에서 유명해진 표현이 바로 “Right leg: hospital, left leg: cemetery”, 즉 “오른발은 병원, 왼발은 무덤”이었다. 오른발 킥을 맞으면 병원에 가고, 왼발 하이킥을 맞으면 무덤에 간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크로캅에게는 또 다른 꿈이 생겼다. 바로 MMA였다. 당시 K-1 스타였던 크로캅은 2001년 MMA로 영역을 넓혔다. 그의 첫 MMA 경기는 일본에서 후지타 카즈유키를 상대로 펼쳐졌고, 크로캅은 강력한 니킥으로 짧은 시간 안에 승리를 거뒀다. 이후 그는 사쿠라바 카즈시, 이고르 보브찬친, 히스 헤링 등 당대의 강자들과 맞붙으며 MMA에서도 자신의 영역을 넓혀갔다. K-1에서 만들어진 타격 능력에 레슬링 방어와 그라운드 기술을 조금씩 더하면서 ‘킥복서 크로캅’에서 ‘MMA 파이터 크로캅’으로 진화한 것이다. 사실 크로캅과 마크헌트의 차이점이 바로 이 점이었다. 프라이드 당시는 크로캅이 MMA파이터로서 완성된 스타일이었는데 이는 크로캅은 스타일 상, 거리를 두고 싸우는 데다가 링에서 경기를 했기 때문에 거리 조절과 풋워크 등이 상당히 수월했지만 헌트는 접근하는 스타일이었고 당시 레슬링 기술도 부재했기 때문에 프라이드에서의 모습을 놓고 보면 크로캅이 훨씬 완성형에 가까웠다.
그리고 2000년대 중반, 그의 전성기는 프라이드에서 폭발했다. PRIDE의 헤비급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체급이었다.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 효도르 에밀리아넨코, 조시 바넷, 마크 헌트, 반다레이 실바 등 세계 정상급 파이터들이 몰려 있었다. 크로캅은 그 안에서 빠르게 최상위권으로 올라갔다. 특히 2005년 효도르와의 대결은 크로캅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경기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크로캅을 효도르를 무너뜨릴 가장 유력한 선수로 봤다. 하지만 효도르는 크로캅의 강력한 타격을 견디며 그라운드 싸움으로 경기를 풀었고 결국 판정승을 거뒀다. 크로캅은 PRIDE 헤비급 챔피언 벨트를 차지하지 못했지만, 이 패배 이후 오히려 더 강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2006년 프라이드 무제한급 그랑프리에서 모든 것을 폭발시켰다. 미노와 이쿠히사, 요시다 히데히코를 연이어 제압한 뒤 준결승에서 당시 PRIDE 미들급 챔피언이었던 반다레이 실바를 만났다. 여기서 크로캅의 왼발 하이킥이 폭발했다. 실바의 머리에 정확하게 꽂힌 하이킥은 경기를 순식간에 끝냈고, 크로캅은 결승으로 향했다. 결승에서는 조시 바넷까지 꺾으며 프라이드 2006 무제한급 그랑프리 우승을 차지했다. 32세 생일에 얻은 이 우승은 크로캅 커리어의 정점이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이름 뒤에 붙어 있던 수많은 ‘아직 우승하지 못한 선수’라는 꼬리표를 떼어냈다. K-1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킥복서였고, MMA에서도 세계 최고의 헤비급들을 차례로 쓰러뜨렸다.
K-1의 크로캅이 ‘공포의 킥복서’였다면, PRIDE의 크로캅은 완성된 종합격투기 선수였다.

3. UFC에서 무너진 황제, 일본에서 다시 살아나다 — 그리고 금지약물이라는 오명


프라이드에서 무제한급 그랑프리 정상에 오른 뒤 크로캅에게 새로운 도전이 찾아왔다. UFC 진출이었다. PRIDE의 몰락과 함께 세계 최고의 파이터들이 UFC로 이동하던 시기였고, 크로캅 역시 2007년 UFC에 입성했다. 당시 팬들의 기대는 엄청났다. PRIDE 무제한급 그랑프리 챔피언이 UFC 헤비급에서도 정상에 오를 수 있을지가 관심사였다.
첫 상대 에디 산체스를 무난하게 제압하면서 출발은 좋았다. 하지만 두 번째 경기에서 인생을 뒤흔드는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다. 상대는 가브리엘 곤자가였다. 2007년 UFC 70에서 곤자가는 크로캅에게 예상 밖의 하이킥 KO를 선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크로캅의 상징과도 같았던 하이킥을 상대가 그대로 돌려준 것이다. 곤자가의 오른발이 크로캅의 머리에 꽂히는 순간, 한 시대를 지배했던 ‘무적의 킥복서’ 이미지가 크게 흔들렸다.
이후 UFC에서는 척추처럼 이어지는 어려움이 시작됐다. 칙 콩고에게 판정패했고, 주니어 도스 산토스에게도 패했다. 프랭크 미어, 브렌던 샤웁 등과의 경기에서도 고전했다. UFC에서의 성적은 결국 4승 5패로 남았다. 크로캅 자신도 훗날 이 성적을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당시 그는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으며 무릎 수술만 네 차례, 발과 코 수술까지 겪었다고 밝혔다.
결국 크로캅은 2011년 UFC를 떠났다. 많은 사람은 이것을 사실상 전성기의 종말로 봤다. 하지만 크로캅의 커리어에서 놀라운 점은 끝났다고 생각할 때마다 다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으로 돌아갔고, 2012년 K-1 월드 그랑프리 우승을 차지했다. 이미 30대 후반이었고, UFC에서 연이어 패배했던 선수가 다시 K-1 정상에 오른 것이다. 이후 다시 MMA로 돌아왔고, 여러 단체를 거치면서 커리어 후반부를 이어갔다. 이후 2015년, 그에게 파이터로서 큰 굴욕을 안겨주었던 가브리엘 곤자가를 상대하게 되었는데 2라운드까지 그라운드에서 고전하면서 악몽이 시작되는건가 싶었다...그도 그럴 것이, 가브리엘 곤자가는 주짓수 블랙벨트에 문디알 대회 우승까지 한 경험이 있는 헤비급에서 강력한 그래플러였기 때문에다
그러나! 크로캅 특유의 위기를 겪을수록 더 강해지는 정신력은 여전했다. 3라운드가 되자 체력이 소진된 곤자가가 크로캅의 카운터에 휘청이기 시작하면서 다운되었고 8년 전 크로캅에게 크나 큰 악몽을 선사했던 그라운드 엘보우를 반대로 곤자가에게 수많이 적중시키면서 역전 KO를 일군 것이다. 이 당시 경기장이 폴란드에서 열렸기에 같은 유럽권 출신이었던 크로캅이 일방적인 환호성을 받았고 경기가 끝나자 현장 분위기는 난리 그 자체였다.
그러던 중 2015년 또 하나의 큰 사건이 터졌다. 크로캅은 UFC에서 앤서니 해밀턴과 싸울 예정이었지만 어깨 부상으로 경기를 취소했다. 그리고 곧 USADA의 반도핑 규정 위반 문제가 발표됐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흔히 알려진 ‘약물검사에서 양성 반응이 나왔다’는 식의 표현과 실제 사건에는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USADA 공식 발표에 따르면 크로캅은 2015년 11월 4일 실시된 비경기 기간 검사 이후 성장호르몬(hGH)의 사용·사용 시도·소지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에 UFC에 자신이 성장호르몬을 사용했다고 알렸고, 이후 USADA에도 이를 인정했다. 결국 2년의 자격정지 처분을 받았다. 크로캅은 당시 심각한 어깨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혈소판 풍부 혈장(PRP) 치료와 함께 성장호르몬을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본인은 어깨를 회복하기 위한 절박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했지만, 성장호르몬이 금지물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직접 인정했다. 따라서 이것은 그의 커리어에서 지워지지 않는 오점으로 남았다.
4. 불사조처럼 돌아온 크로캅 — RIZIN 우승, 뇌졸중, 그리고 지금



2015년 약물 사건과 은퇴 발표 이후 많은 사람들은 크로캅의 시대가 정말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크로캅은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놀랍게도 RIZIN에서 자신의 커리어를 다시 한번 불태웠다. 2016년 RIZIN 무제한급 그랑프리에 참가한 크로캅은 조지 프로코프츠, 킹 모, 아미르 알리아크바리 등을 차례로 꺾으며 정상에 올랐다. 특히 결승에서 알리아크바리를 펀치로 쓰러뜨리며 2016 RIZIN 무제한급 그랑프리 우승을 차지했다. 2006년 PRIDE 무제한급 그랑프리 우승 이후 정확히 10년 만에 다시 무제한급 그랑프리 챔피언이 된 것이다.
이후에도 크로캅은 나이를 무색하게 하는 경기력을 보여줬다. 츠요시 코사카, 로케 마르티네즈 등을 꺾었고, 2019년에는 Bellator에서 8년 전 자신에게 승리를 거뒀던 로이 넬슨과 재대결했다. 첫 경기에서 넬슨에게 패했던 크로캅은 두 번째 경기에서 판정승을 거두며 복수에 성공했다. 이 승리는 결국 그의 마지막 공식 MMA 경기로 남게 된다. 당시 그의 MMA 전적은 38승 11패 2무 1무효였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마지막에 10연승을 기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2019년 3월,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진짜 마지막이 찾아왔다. 크로캅은 훈련 중 뇌졸중을 겪었다. 병원 치료를 받은 뒤 그는 자신의 선수 생활을 끝내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그는 다시 운동을 할 수는 있더라도 더 이상 스파링을 하거나 머리에 충격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의료진의 경고를 받아들였다. 크로캅은 그동안 몇 차례 은퇴를 선언했다가 다시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정말 끝이었다.
그렇게 약 20년이 넘는 그의 파이터 인생이 막을 내렸다. 하지만 크로캅은 은퇴 이후에도 완전히 격투기를 떠나지는 못했다. 그는 젊은 선수들의 훈련을 도와주고 체육관에서 운동을 계속했다. 그리고 2025년에는 뜻밖의 이야기가 나왔다. 효도르 에밀리아넨코와 복싱 방식의 이벤트 경기를 추진할 가능성이 공개된 것이다. 크로캅은 효도르 측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당시 자신의 건강 상태가 정기적인 검사를 통해 괜찮다고 설명했다. 다만 실제 경기 일정과 세부 조건은 확정된 상태가 아니었고 결국은 흐지부지 되었다.
2026년에는 복귀설이 더욱 커졌다. 크로캅은 자신이 여전히 훈련하고 있다고 밝혔고, FNC 측에서도 그의 복귀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다만 이것은 확정된 정식 복귀가 아니라 가능성이 거론되는 단계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2026년 3월에는 프란시스 은가누와의 대결 제안을 받았다는 사실도 알려졌지만, 크로캅 본인은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이라는 취지의 반응을 보였다. (아무리 크로캅이라 해도 이걸 받는게 말이 안 된다...전성기때 붙는다 해도 은가누의 피지컬과 파워를 생각하면 제아무리 크로캅이어도 힘들었을텐데 하물며 50이 넘은 시점에서;;)
그리고 2026년 현재 크로캅은 51세다. 그는 여전히 훈련을 이어가고 있으며, 2026년 인터뷰에서는 과거보다 강도를 낮췄지만 아침에는 턱걸이, 저녁에는 MMA 훈련과 근력·카디오 운동 등을 하는 등 꾸준히 몸을 움직이고 있다고 전해졌다.
크로캅이라는 이름이 특별한 이유
크로캅의 커리어를 단순히 승리와 패배의 숫자로만 보면 그의 진짜 이야기를 놓치게 된다. 그는 전쟁을 겪은 가난한 소년에서 출발했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차고의 샌드백을 두드리며 운동했고, 아버지를 잃은 뒤에도 살아남기 위해 싸웠다. K-1에서는 세계 최정상급 파이터가 됐고, PRIDE에서는 효도르에게 패배했지만 끝내 2006년 무제한급 그랑프리를 정복했다. UFC에서는 기대와 달리 무너졌지만 일본에서 다시 K-1 정상에 올랐다. 약물 사건으로 커리어에 오점을 남겼지만 다시 RIZIN으로 돌아와 10년 만에 또 하나의 무제한급 그랑프리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2019년 뇌졸중으로 링을 떠날 때까지 마지막 경기에서 로이 넬슨에게 복수하며 10연승으로 커리어를 끝냈다.
그가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은 단순히 ‘하이킥이 강했던 선수’라는 것이 아니다. 정상에 올라가는 것보다, 정상에서 떨어진 뒤 다시 올라오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 선수였다는 데 있다.K-1, PRIDE, UFC, RIZIN, Bellator을 모두 경험했고, PRIDE와 RIZIN에서 무제한급 그랑프리를 각각 우승했다. 특히 PRIDE와 RIZIN의 무제한급 그랑프리를 모두 제패한 것은 크로캅의 커리어를 상징하는 기록이다. 그의 이름을 들었을 때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여전히 그 차가운 표정과 왼발 하이킥일 것이다.
“오른발은 병원, 왼발은 무덤.”
그러나 미르코 크로캅의 진짜 전설은 그 왼발 하나가 아니었다.
쓰러질 때마다 다시 일어났던 그 집요함 자체가 크로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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