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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투기 관련 역사

K-1의 흥망성쇠: 세계 최고의 입식격투기 무대는 어떻게 탄생하고, 쇠퇴했으며, 다시 살아났는가

by 사모안괴물 2026. 10. 1.

  필자가 격투기를 처음 본게 2001년 말이라 했는데, 이 시기는 한국에서 격투기 자체가 주목을 받기 전이었다. 오히려 이 시기는 wwe가 인기 많았던 거로 기억하는데(본인 역시 wwe 매니아였고 당시에 더들리보이즈를 좋아했다. 학교에서 3D 따라서 쓰다가 하루 한 번씩 피 본건 덤...) 집에서 우연히 espn을 보다가 K-1이라는걸 접하게 됐고, 그 대회에서 우승한 파이터가 바로 마크헌트이다! 다시 말해 필자가 마크헌트의 팬이 된지 만 25년이 된거라 봐도 무방하다.

  이 블로그는 MMA, 주로 UFC와 관련되서 주로 집필을 할 예정이지만 가끔씩 MMA가 아닌 기타 격투기나 무술 등도 언급할 예정이다. 오늘은 지금의 마크헌트를 존재하게 만든 단체인 K-1이 어떻게 생기고, 번성했다가 쇠퇴하기 시작해서 몰락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사실 경기를 뛴 기간만 놓고 보면 헌트도 UFC에서의 기간이 훨씬 길다. 마크헌트 하면 입식 타격가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사실 종합격투기 무대에 뛴게 2003년~2018년까지였고 이 중 절반의 시간을 UFC에서 승패를 반복하면서 버텼다. 잠정 타이틀전까지 치뤘지만 베우둠에게 아쉽게 패하며 타이틀의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하지만 마크헌트의 핵펀치와 금강불괴 맷집을 알려준 경기들은 K-1에서 시작되었고 챔피언까지 먹은 경험이 있기에 격투가로서의 전성기는 K-1시절이라 봐도 무방하다. 일단 당시 나이가 20대이기도 했으니 한창이고...

  K-1은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세계 격투기 시장을 대표했던 입식격투기 대회였다. 가라테, 킥복싱, 무에타이 등 서로 다른 타격 종목의 강자들이 하나의 규칙 아래에서 맞붙는다는 독특한 콘셉트와 화려한 연출, 그리고 토너먼트 방식은 K-1을 단순한 격투기 대회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스포츠 엔터테인먼트로 만들었다. 특히 한국에서는 최홍만의 등장과 함께 K-1의 인기가 크게 올라갔고, 한때 국내에서도 상당한 대중적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2010년 전후로 경영과 방송 환경, 선수 영입 및 출전료 문제 등이 겹치면서 원래의 K-1은 사실상 붕괴했고, 이후 새로운 조직을 통해 브랜드가 부활했다.

1. K-1의 시작과 전성기, 그리고 한국에서의 흥행

 
 
 
피터아츠(좌)와 어네스트 후스트(우). 두 선수 모두 네덜란드 출신으로 20세기를 대표하는 킥복서였다.
 
 

  K-1은 1993년 일본에서 이시이 카즈요시가 창설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입식격투기에는 가라테, 킥복싱, 무에타이 등 여러 종목이 존재했지만 서로 규칙이 달랐기 때문에 '어떤 종목의 선수가 가장 강한가'를 직접 비교하기 어려웠다. K-1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타격 종목의 선수들이 공통된 규칙 아래에서 경쟁하도록 만들었다. 이름의 'K'에는 가라테(Karate), 킥복싱(Kickboxing), 쿵푸(Kung Fu) 등의 의미가 담겼으며, '1'은 최고의 선수를 결정한다는 의미였다.

  1993년 4월 30일 도쿄 요요기 제1체육관에서 첫 K-1 그랑프리가 열렸고, 크로아티아 출신 브랑코 시카틱(크로캅의 스승이었으나, 훗날 어떤 이유에서인지 안좋게 갈라섰다고 한다.) 이 초대 챔피언에 올랐다. 이후 피터 아츠, 앤디 훅, 어네스트 후스트, 제롬 르 밴너, 레미 본야스키, 세미 슐트 등 세계적인 선수들이 K-1의 대표적인 스타로 성장했다. 특히 도쿄돔에서 개최된 월드 그랑프리는 수만 명의 관중을 끌어모으며 K-1의 상징적인 무대가 됐다. K-1 공식 자료에 따르면 전성기에는 일본 지상파 3개 방송사와 세계 135개국에 중계됐으며, 최대 9만 명의 관중을 동원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K-1의 흥행에는 토너먼트 방식도 큰 역할을 했다. 여러 지역 예선을 거쳐 세계 정상급 선수들이 최종 토너먼트에 모이고, 짧은 시간 안에 연속해서 승리해야 우승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경기 하나하나의 긴장감이 상당했다. 단순히 챔피언을 가리는 것보다 '오늘 하루 세계 최고의 선수가 누가 되는가'라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2002년에는 70kg급을 중심으로 한 K-1 WORLD MAX도 출범하면서 헤비급 중심이었던 K-1의 영역을 중량급 이하로 넓혔다.

  한국에서는 최홍만의 등장이 K-1 흥행에 특히 중요한 계기가 됐다. 천하장사 출신이었던 최홍만은 2005년 K-1 서울대회에서 데뷔했고, 218cm의 거대한 신체조건과 씨름에서 다져진 힘을 앞세워 단숨에 스타가 됐다. 데뷔전에서 아케보노와 와카쇼요를 꺾고 결승에서 카오클라이를 제압하면서 아시아 GP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서울대회에는 약 1만5천900명의 관중이 몰렸다.

  최홍만의 인기는 국내 방송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2005년 최홍만과 레미 본야스키의 경기 당시 MBC ESPN 순간 시청률은 22.78%**까지 올라 당시 케이블·위성방송 최고 기록을 세웠고, 같은 해 최홍만과 밥 샙의 경기 역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따라서 한국에서 K-1이 대중적인 관심을 얻는 과정에서 최홍만이 핵심적인 흥행 카드였다고 볼 수 있다. 최홍만의 등장으로 씨름이라는 익숙한 국내 스포츠와 일본의 K-1이 연결됐고, K-1을 잘 몰랐던 사람들도 '테크노 골리앗'이라는 이름을 통해 대회를 접하게 됐다.

2. K-1의 쇠퇴와 몰락, 그리고 브랜드의 재출발

 
 
 
 

  K-1은 2000년대 초반까지 엄청난 인기를 누렸지만 2000년대 후반부터 여러 문제가 동시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일본 내 방송과 흥행의 약화였다. K-1은 일본 TV 방송과 대형 스폰서, 대규모 경기장 흥행에 크게 의존하는 사업 구조를 가지고 있었는데, 일본에서 격투기 인기가 떨어지면서 이 구조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2011년에는 K-1과 자매격인 DREAM의 프로그램이 일본 지상파 방송에서 빠지면서 방송 수익 측면에서도 큰 타격을 받았다.

  선수층의 변화 역시 문제였다. K-1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피터 아츠, 어네스트 후스트, 레미 본야스키, 제롬 르 밴너 등은 나이가 들면서 은퇴하거나 전성기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반면 새로운 세대의 스타들이 기존 선수들만큼 빠르게 대중적인 인지도를 확보하지 못했다. 세미 슐트가 2005~2007년 3년 연속 월드 그랑프리를 차지하고 2009년에도 우승하면서 강력한 지배력을 보여줬지만, 그 과정에서 토너먼트의 다양성과 스타 경쟁 구도에 대한 팬들의 관심이 예전만큼 유지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K-1 공식 기록상 슐트는 2005, 2006, 2007, 2009년 총 네 차례 월드 GP를 우승했다.

  더 직접적인 문제는 재정난과 선수 출전료 문제였다. K-1을 운영하던 FEG는 2010년 무렵부터 심각한 자금 문제를 겪었고, 선수와 관계자들에게 출전료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는 문제가 공개적으로 제기됐다. 결국 2011년 K-1 월드 그랑프리 개최가 무산됐고, 당시 FEG가 사실상 파산 상태라는 관계자의 발언까지 나왔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레이 세포 등 일부 관계자들은 FEG가 선수들에게 상당한 규모의 미지급금을 안고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스타 선수들의 이탈도 이어졌다. 알리스타 오브레임, 바다 하리, 고칸 사키 등 주요 선수들이 K-1을 떠나거나 다른 무대로 활동 영역을 옮겼다. K-1은 결국 2011년을 마지막으로 원래의 조직 체계에서 활동이 사실상 중단됐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K-1이라는 종목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2012년에는 K-1 Global이라는 새로운 조직을 통해 브랜드를 되살리려는 시도가 이어졌고, 이후 일본 국내에서는 새로운 K-1이 출범했다.

  2014년에는 새로운 K-1 실행위원회가 출범하면서 이른바 '신생 K-1' 시대가 시작됐다. 과거처럼 1990~2000년대의 거대한 헤비급 월드 그랑프리를 중심으로 한 형태와는 달리 다양한 체급을 운영하고 일본 국내 대회와 젊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생태계를 구축했다. K-1 공식 자료에 따르면 2017년에는 K'FESTA.1을 개최했고, 2022년에는 K-1의 출발점이었던 요요기 제1체육관에서 대회를 열었으며, 2024년에는 세계 라이선스 전략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즉, K-1의 역사는 '완전한 소멸'보다는 황금기의 K-1이 경영난으로 붕괴하고 이후 새로운 형태로 부활한 과정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3. K-1을 대표했던 파이터들과 그들의 현재

어네스트 후스트
 
피터아츠
 
세미슐트(좌)와 바다하리(우)
 
 

  K-1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수많은 전설적인 파이터들이다. 가장 먼저 언급할 선수는 어네스트 후스트(Ernesto Hoost)다. 'Mr. Perfect'라는 별명으로 불린 후스트는 K-1 WORLD GP를 네 차례 제패한 대표적인 기술형 헤비급 파이터였다. 1997년, 1999년, 2000년, 2002년에 우승했으며, 펀치와 로킥을 연결하는 정확한 기술과 경기 운영 능력으로 K-1의 기술적 수준을 상징하는 선수로 평가받았다. 2006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났으며 이후에는 지도자로 활동해왔다.

  피터 아츠(Peter Aerts) 역시 K-1을 대표하는 전설이다. 'Dutch Lumberjack'이라는 별명답게 강력한 하이킥과 공격적인 스타일로 유명했던 아츠는 1994년, 1995년, 1998년 세 차례 월드 그랑프리를 우승했다. 특히 1998년 도쿄돔 결승에서는 앤디 훅을 꺾으며 전성기의 정점을 찍었다. 이후에도 오랜 기간 정상급 선수들과 경쟁했고 2006년, 2007년, 2010년에는 다시 결승에 진출할 정도로 긴 전성기를 보여줬다. 현재 GLORY의 선수 데이터베이스에서는 은퇴 선수로 분류되고 있으며, 2026년에도 다른 선수들의 체육관을 방문해 스파링하는 등 격투기와의 인연을 이어가는 모습이 소개됐다.

  세미 슐트(Semmy Schilt)는 K-1 역사상 가장 독특한 헤비급 파이터 가운데 한 명이다. 212cm의 신장과 긴 리치를 활용해 잽과 프런트킥으로 거리를 지배했고, 2005·2006·2007·2009년 네 차례 월드 GP를 우승했다. 2013년 현역에서 은퇴한 뒤 현재는 자신의 Fight Game Academy를 운영하며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자신의 경험을 후배 선수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중요한 활동으로 삼고 있다.

  레미 본야스키(Remy Bonjasky)는 'Flying Gentleman'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뛰어난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플라잉 니와 점프 킥을 구사했던 그는 2003년, 2004년, 2008년 세 차례 K-1 월드 GP를 차지했다. 현재는 네덜란드에서 자신의 Bonjasky Academy를 운영하면서 킥복싱과 복싱, MMA 등을 지도하고 있다.

  한국 팬들에게는 역시 최홍만을 빼놓을 수 없다. 최홍만은 2005년 K-1 서울대회에서 데뷔해 아시아 GP를 우승했고, 밥 샙과 세미 슐트 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K-1의 대표적인 한국인 스타로 자리 잡았다. 특히 2005년 레미 본야스키와의 경기에서 기록한 22.78%의 케이블 순간시청률은 당시 국내에서 그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다.

최홍만의 최근 행보도 흥미롭다. 2026년 1월 대한MMA연맹 부회장으로 선임되면서 격투기 행정 분야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동시에 향후 격투기 복귀 가능성을 언급했다. 2026년 보도에서는 이르면 2027년 복귀전을 준비할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지만, 실제 경기 일정은 확정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이처럼 K-1의 전설들은 대부분 현역에서 물러났지만 코치, 체육관 운영자, 격투기 관계자 등으로 활동하며 자신들의 경험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존재는 K-1이 단순히 한때 유행했던 격투기 대회가 아니라 현대 킥복싱의 세계적인 스타와 경기 문화를 만들어낸 중요한 역사적 무대였음을 보여준다. 현재의 K-1 역시 과거와는 다른 형태로 대회를 이어가고 있어, K-1의 역사는 '몰락으로 끝난 이야기'라기보다 하나의 황금시대를 지나 새로운 형태로 재편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